[발언대] 맨해튼 한식당 설립 성급하다
최근 정부가 출자한 재단에서 나랏돈 50억 원을 투자해 미국 맨해튼에 한식당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개인이나 웬만한 중소기업의 투자비로 50억 원은 적은 액수가 아니지만, 우리나라 전체 살림살이로 볼 때는 그야말로 껌 값에 불과하다. 문제는 액수가 아니다. 적소에 제대로 쓴다면 5000억 원도 오히려 적을 수 있지만, 잘못 쓰인다면 단돈 5만원도 아깝다. 아무래도 적은 돈은 아니기 때문에 추진 주체가 나름대로 심사숙고해 결정했을 것이라고 믿지만 나의 셈법은 좀 다르다. 전례에 비추어 보면, 이 계획 역시 과거 유사한 사례를 따라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 공산이 크다. 이 돈 50억 원은 결제되는 순간 이미 나랏돈이 아닌 ‘눈먼’ 돈이 돼 남의 나라에서 공중 분해되어도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다. 일회성이 반복되고 축적되면 고질적인 병폐가 된다. 오해 없기 바란다. 지난 20여 년간 한식 세계화를 위해 미력이나마 보태온 사람으로서 나는 누구보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할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보인다. 아마도 맨해튼에 세워질 한식당은 현지 상류층을 겨냥해 품위 있게 꾸며질 것이고, 요리사들의 연구개발을 거쳐 최고급 한식을 선보이게 될 것이다. 일각에서 우려하듯이 중저가의 현지 한식당과 경쟁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세계를 겨냥한 새로운 한식이 호응을 얻게 되면 벤치마킹의 대상이 돼 한국식당의 수준이 향상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본고장에서 사랑 받지 않은 음식이 외국에 나가 세계화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 이 말은 우리의 문화 수준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해야 한식도 세계화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일의 순서가 뒤바뀐 것은 한식의 세계화를 음식장사 정도로 쉽게 생각하는 관행 때문이다. 한식 세계화의 핵심은 우리의 음식 문화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새로운 식재료를 개발하고 서양인의 입맛에 맞게 요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한식이 세계적인 요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음식’은 문화적 세팅의 일부지만 ‘음식문화’는 음식을 둘러싼 문화적 산물 일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음식문화를 향상시키는 것은 문화 전반을 혁신하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이며 동시에 문화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서구 문화에 우리의 혼을 빼앗겨 온 지 100년이다. 이제는 문화적으로도 국권을 회복할 때다. 한식의 세계화는 문화운동이다.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그 흐름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온 것이 인류의 문명사다. 한식 세계화도 영향력과 안목을 갖춘 이들이 선도한다면 단시일 내에 효율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 일본의 도요타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개발팀에 1년간 세계 여행을 시켰다. 그리고 최고의 자동차, 최고급 호텔과 식당, 그리고 최고급 음식과 와인을 체험케 했다. 이러한 혁신적 전략이 렉서스라는 명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는 인간은 자신이 체험한 것 이상을 창조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나온 발상이었을 것이다. 내가 대기업이 음식문화를 선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그들이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를 체험해 봤기 때문이다. 대기업 회장 직속으로 ‘한국식생활문화 세계화’ 팀을 두고 10여 명의 직원이 기업의 경제력과 조직력, 그리고 문화력을 집중시켜 이 사업의 계획을 만들고 실행한다고 가정할 때 드는 비용은 대략 100억 원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거대한 변혁을 몰고 올 종자돈 치고는 너무 작지 않은가? 이들의 안목으로 한식당을 꾸미고 새롭고 고급스러운 한식 메뉴를 탄생시키면 한식업 종사자 사이에 가치를 창조하려는 경쟁이 일어나 수직적 다양성이 생겨날 것이다. 피라미드식 음식산업 구조는 경쟁을 통해 한식의 진화를 촉진시킨다. 이 식당은 기업의 접대 장소와 임직원들이 식생활 문화를 체험하는 곳으로 활용될 것이며, 이러한 음식문화가 대중의 선망을 일으키게 되면 우리의 의식에도 변화가 올 것이다. 또한 음식문화의 활성화로 내수경제가 커지면 고용 창출, 농어촌 개발, 유통의 선진화, 공예품의 시장 형성, 전통식품의 생산과 수출 등 경제적 시너지 효과도 엄청날 것이다. 세계화는 이렇게 바로 이 땅에서 시작돼야 한다. 조태권 광주요 그룹 대표